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체인질링 영물들에게 둘러싸여 눈부신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동심원들이 찰랑거렸습니다. 깊이 깊이 아주 깊은 데까지 젖은 돌이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습니다. 바꿀 것이 있는데 나의 아름다운 악몽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지평선이 없었습니다. 시집 『생물성』과 마찬가지로 신해욱의 시집은 시집의 첫번째 시에서 이후 시에 대한 많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김소연 시인의 설명처럼(「헬륨 풍선처럼 떠오르는 시점과 시제」,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 발문 中) 신해욱의 시는 연과 연 사이에 깊은 계곡이 흐른다. 아득한 시차가 느껴지기도 하고, 앞 연의 의미가 뒤따라 오는 연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아, 의미의 이해가 지연되기도 한다. 위의 작품은 '영물 - 동심원 - 젖은 돌 - 악몽 - 지평선', ..
축, 생일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
우리는 해가 뜰때 일어나 밭을 일구었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꿈으로 엮은 노래를 불렀네 - 「보리 감자 토마토」 中 박은지 시인의 시를 읽었다. 「정말 먼 곳」이라는 등단작은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선명한 묘사보다 쓸쓸한 독백으로 가득 찬 시집이었다. 그야말로 "꿈으로 엮은 노래". 꿈은 묘사를 통해 보여주기 보다, 들려주어야 한다. 밤새도록 누군가의 귓가에 고백되어야 한다. 추상으로 가득한 꿈을 간결한 독백으로 들려주는 것이 박은지 시의 미덕이다. 이때 '꿈'은 '기억'이라는 이름을 치환 가능하며, 박은지의 시가 자유를 확보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시인은 수시로 꿈 속으로 들어간다. 꿈에서는 어제를 살고 깨어나서는 내일을 살았다 - 「뜸하게, 오늘」中 한편 시인에게 '꿈'은 일종의 도피처..
파도는 내가 버린 얼굴들이었으므로 나의 해변은 항상 모래성보다 먼저 폐허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처럼 내게 맞지 않는 신발들만 밀려왔다 - 「해변의 커튼콜」 中 육호수의 시집을 읽었다.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이다. 파란색 시집이 바다같아서 투명한 바다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들었다. 시집을 읽을때마다, 해당 시집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찾는데 골몰한다. 그것은 다른 시집과 구별되는, 해당 시집만의 고유한 '차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무엇이 이 시집을 육호수의 시집이 되게했을까. 육호수의 시집을 육호수의 시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과연 이러한 고유성은 어디에 있을까? 시인이 구사한 어휘에 있을까? 그가 시에서 사용한 어휘를 나열한 후에 그 의미를 추적 분석하..
소녀와 달빛 소녀는 잠을 잔다 나무의 발목에서 우물의 옆구리까지 걸어간다 그사이 태어난 아기를 훔친다 아기를 달과 함께 우물에 던진다 엄마는 달려와 물을 퍼낸다 소녀는 계속 잠을 잔다 우물의 겨드랑이에서 나무의 손목까지 걸어간다 그사이 태어난 아기를 나무 위로 던진다 달과 함께 아기가 나뭇가지에 걸린다 엄마는 나무를 가만가만 타고 오른다 소녀는 잠을 잔다 나무의 목에서 공중의 물까지 걸어간다 그사이 태어난 아기를 지붕 위 달 옆에 올려놓는다 엄마는 집을 납작하게 찌그러뜨리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누가 아기를 여기다 낳아 놓았나! 엄나가 아기를 안는다 소녀는 계속 잠을 잔다 -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中 근래 나는 언어의 의미와 이미지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의미에 의지해 시의 중심에 다가서는 독법은 ..
김언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을 읽었다. 그의 작품에는 신파가 없다. 작품이 쓰여지기 이전의 경험 세계를 작품이 쓰여지는 공간으로 진입시키며 철저하게, 그렇지만 세련되게 통제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이 개성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작품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정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감정적 인과를 마치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접속사에 집착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작품은 나의 의지를 벗어난 곳에서 완성된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다보니 나의 작품은 조금 촌스런 인상을 준다. 김언의 작품은, 작품을 읽고 있다는 생각보다 작품론을 읽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의 시를 볼때는 그의 방법론을 파악해 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