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는 무엇이고 ‘영화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잘 짜여진 스토리, 탄탄한 서사구조가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것만으로 영화를 소설이나 웹툰 등의 다른 장르로부터 변별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의 영화로부터 오는 특정 감정을 설명해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것이 영화의 작동방식 또는 영화가 구성되는 원리로부터 비롯된 감정인지, 적절하게 배치된 이야기 구조를 통해 촉발된 감정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영화 카지노는 ‘에이스’(로버트 드니로)의 차량이 폭발하는 숏으로 시작된다. 폭발의 충격으로 튀어오른 에이스가 화염 속으로 오래오래 떨어지는 장면을 인트로로 사용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면이다. 그도그럴 것이 이후 관객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일주일간의 자가격리를 마쳤다. 처음에는 그 증상이 몸살 감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목이 붓고 등 근육이 쑤신 것 외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확진 판정을 받고도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코로나가 막 창궐하기 시작한 2020년 초와 비교해보면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코로나 초기 우리 공동체는 많이 우왕좌왕했었다. 낯선 대상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보니 미래를 예측하거나 앞으로 벌어질 일을 통제할 어떤 계획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성으로 장악하지 못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두려움과 공포는 필시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
한해가 저물어간다. 2022년도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올해는 유독 힘들었던 기억들이 가득하다. 어떤 사건은 구체적 액션으로 가시화되기도 하지만, 힘겨운 일들은 언제나 내면에서 진행된다. 겉으로 가시화되어 경험하는 사건들은 시간적 선후의관계나 인과의 구조를 비교적 명확하게 추론해 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내면에서 진행되는 문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어 그 실체를 마주하기 쉽지 않다. 나의 말과 너의 감정이 뒤섞여 있기도 하고, 우리의 웃음과 그들의 눈물이 경계도 없이 뒤엉켜있다. 가끔 우울한 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살짝 단서를 흘리기도 하지만, 뒤엉켜 있는지도 모르는 사이 모든 것이 엉켜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만큼 막막한 일도 없다. 나에게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순간에 ..
선거 후유증 선거가 끝났다. 내가 지지한 후보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지 못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후보의 당선을 앞에두고 하루종일 무기력했다. SNS를 통해 표출되는 지지자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들 과몰입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다. 후보의 삶과 후보의 가치와 비전에 감정이입하며 지지 후보를 응원했다. 그래서 특히 이번 선거는 단순히 공동체의 지도자를 뽑는 선거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어리석은 일이지만 나의 판단과 분석, 나의 지난 삶이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부정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패배감에 젖게 하는 선거가 되었다. 또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알게 했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하다. 패배를 받아..
의식의 흐름을 따르며 네가 나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장소들이 궁금해. 너는 어디에 있는 나를 기억할까. 너의 상상력은 나를 어디까지,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나를 상상하는 너를 상상하면 나는 네 주위를 하염없이 맴돌 수 있을까. 너를 상상하는 나를 상상하면 너는 내 품으로 걸어들어올 수 있을가. 너는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한참을.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중얼거렸지. 미안합니다, 너는 사람을 잘못 봤다고 몹시 부끄러워했어. 내가 사람 모양을 하고 있구나, 그때 나는 생각했지. 너는 왜 부끄러울까 그때 너는 다른 시간 속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때 나는 너의 등 뒤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내가 비 모양을 하고 있구나, 그런데 내 모습이 그렇게 변할 걸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기다렸다는 ..
좋은 날이야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어느 날의 잠에서 깨어나 떠올린 기억이 어느 날의 산책이 아니라 산책 없이 헤어진 날 들었던 너의 목소리라면 그것은 사랑이다 - 「사랑과 교육」 中 내가 『철과 오크』를 읽었던가? 기억나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사랑과 교육』도 꼭 그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 「사랑과 교육」을 좋아한다. ‘사랑’과 ‘교육’의 강제적 결합이 교집합을 매개로 형성하는 비유도 적당하다고 본다. '사랑의 교육'에 비해 훨씬 근사한 제목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승언의 시에는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 구별되는 그만의 섬세함이 있다. 하나의 사건 또는 경험에 대해 다른 사람들 보다 몇배는 많은 시적 국면을 발견한다. 동일한 사건 또는 경험을 시로 표현 가능한 최소단위로 쪼개는 ..
집으로 돌아온 너는 당분간 잠잠해졌어. 잠깐의 외출동안 네가 마주쳤던 눈부신 오징어 뼈 영원한 셔틀콕 땅에서 솟아오르던 아름다운 종려나무를 떠올리며 언니를 집을 박수 소리를 다정하게 대해보려 했지만 - 「부동시」中 박지일 시인의 실험에 동의한다. 구어의 세계, 문어적 전통의 관습적 문장이 쥐어짜는 감정과 전략적 거리두기!! 립싱크 하이웨이에 수록된 작품들의 배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의 화법은 다양해 보이지만, 크게 두개의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해 보인다. (유형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지만) 시적 전략으로서 그의 문체 실험에 해당하는 작품군이 한 부류이며, 구어적 습관으로 자유롭게 늘어놓는 발화가 또 한 부류이다. 하여 같은 시집의 최가은의 평에서 레몽 크노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