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5)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 김행숙 (문학과지성사, 2020) 의식의 흐름을 따르며 네가 나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장소들이 궁금해. 너는 어디에 있는 나를 기억할까. 너의 상상력은 나를 어디까지,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나를 상상하는 너를 상상하면 나는 네 주위를 하염없이 맴돌 수 있을까. 너를 상상하는 나를 상상하면 너는 내 품으로 걸어들어올 수 있을가. 너는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한참을.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중얼거렸지. 미안합니다, 너는 사람을 잘못 봤다고 몹시 부끄러워했어. 내가 사람 모양을 하고 있구나, 그때 나는 생각했지. 너는 왜 부끄러울까 그때 너는 다른 시간 속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때 나는 너의 등 뒤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내가 비 모양을 하고 있구나, 그런데 내 모습이 그렇게 변할 걸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기다렸다는 ..
[시집] 사랑과 교육 / 송승언(민음사, 2019) 좋은 날이야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정말 어느 날의 잠에서 깨어나 떠올린 기억이 어느 날의 산책이 아니라 산책 없이 헤어진 날 들었던 너의 목소리라면 그것은 사랑이다 - 「사랑과 교육」 中 내가 『철과 오크』를 읽었던가? 기억나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사랑과 교육』도 꼭 그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 「사랑과 교육」을 좋아한다. ‘사랑’과 ‘교육’의 강제적 결합이 교집합을 매개로 형성하는 비유도 적당하다고 본다. '사랑의 교육'에 비해 훨씬 근사한 제목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승언의 시에는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 구별되는 그만의 섬세함이 있다. 하나의 사건 또는 경험에 대해 다른 사람들 보다 몇배는 많은 시적 국면을 발견한다. 동일한 사건 또는 경험을 시로 표현 가능한 최소단위로 쪼개는 ..
[시집] 립싱크 하이웨이 / 박지일(문학과지성사, 2021) 집으로 돌아온 너는 당분간 잠잠해졌어. 잠깐의 외출동안 네가 마주쳤던 눈부신 오징어 뼈 영원한 셔틀콕 땅에서 솟아오르던 아름다운 종려나무를 떠올리며 언니를 집을 박수 소리를 다정하게 대해보려 했지만 - 「부동시」中 박지일 시인의 실험에 동의한다. 구어의 세계, 문어적 전통의 관습적 문장이 쥐어짜는 감정과 전략적 거리두기!! 립싱크 하이웨이에 수록된 작품들의 배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의 화법은 다양해 보이지만, 크게 두개의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해 보인다. (유형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지만) 시적 전략으로서 그의 문체 실험에 해당하는 작품군이 한 부류이며, 구어적 습관으로 자유롭게 늘어놓는 발화가 또 한 부류이다. 하여 같은 시집의 최가은의 평에서 레몽 크노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
[시집] 태양의 연대기 / 장석원 (문학과지성사, 2008) 출렁이는 어둠 속에서 아이가 보인다 쌀알처럼 반짝이는 아이의 발끝에서 뿌리가 나오고 손가락에서 새순이 돋고 겨드랑이에서 덩굴이 뻗어 나온다 그때 바깥은 가을이 되고 바람은 차가워지고 한꺼번에 불어오는 바람 광폭했다 두 젖꼭지는 땅을 뚫고 오르는 싹이고 입으로는 열매를 뱉고 귀로 가지를 내보내고 아래로는 은하수가 흘러나간다 밤마다 구멍으로 별이 침입하고 바람이 혀 내밀어 아랫도리를 훑었다 누가 빛보다 빠르게 소멸했는가 누가 빛보다 빠르게 다가와 나와 마주쳤는가 꽃바지 꽃바지 입은 그녀 입벌리고 잠들었는데 - 「하남 가는 심야 좌석 버스의 떡 장사」 中 자칫 장석원의 시를 읽다 보면 시에 삽입되거나 불쑥 불쑥 간섭하는 링크들이 몹시 귀찮게 느껴질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문장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와 그것..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문학과지성사, 1992)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