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 황병승
- REVIEWS/시집
- 2021. 9. 29.
어떤 등장은 매우 인상적이다. 등장 자체가 하나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많은 시집들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면서 자신은 진화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변화를 시도하기 전에 그는 닫힌 세계가 되었다. 시집에 대한 해설은 여기저기 넘쳐나니 궁금한 사람은 직접 찾아읽어보길 권한다. 나는 여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기록하고 있을뿐이다.
사실 나에게는 문장을 연습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는 나의 문장이 모국어의 문법을 벗어나지 못할때, 황병승의 시집을 읽는 것이다. 평론가들이 언급하는 시 속, 다양한 주체들은, 이미 어디에나 있었다. 이장욱이 말하는 '고무 찰흙 주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많은 예술 장르를 거쳐 드디어, 마침내 시라는 장르 속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 '늦음'은 시가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장르와 달리 너무나 견고한 의미와 질서로 구축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주체들이 시에 기입되기 위해서는 '승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승인대기는 이미 여러차례 있었다. 일상의 '의미'와 '질서'는 다소 까탈스러운데가 있다.
더욱이 나는 얼마나 충실한 모국어 화자인가. 언어에 의해서 우리는 생각되어지고, 그렇게 생각되어진 내가 주체가 된다. 나는 질서와 고정된 의미 속에서 충분히 예측가능한 사람이다. 그러니, 소재를 차용하여 시라는 장로 속에 풀어놓는 것에 비하여, 의도적으로 문법적 질서를 벗어나며 문장을 나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준규의 작품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둘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질감의 차이를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시인의 죽음은 비극적인 데가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나는 그와 정서적으로 하나의 외로운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진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감싸주는 감정이 되지 못해 혼자 감당해야 시간, 아마 그 시간들이 모여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