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밤과 꿈의 뉘앙스 / 박은정(민음사, 2020)
- REVIEWS/시집
- 2022. 1. 1.
얼룩진 체온을 닦아 주어도
내일이면 바닥으로 흐르는 몸들
- 「아가미의 시절」 中
이곳은 미세먼지가 나쁨인 초여름의 빌라, 너와 나의 거리는 일정하게 움직인다.
- 「구(球)」의 첫문장
꽃병의 물이 썩어 간다
- 「악력(握力)」의 첫문장
박은정의 시는 첫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말은 단순히 시의 맨 앞에 있는 문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화자의 최초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첫문장이다. 이 문장을 통해서 시인은 화자가 머물고 있는 특정 맥락 속에서 화자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나는 「구(球)」와 「악력(握力)」이 박은정의 작품이 구성되는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두 작품은 시의 문장이 구성되는 방식이 동일하다. 가장 의식적인 문장은 첫문장이고, 이후의 문장은 바로 앞의 문장에 의해서 촉발된다. 시는 앞선 문장이 문장을 불러들이며 구성된다. 첫문장은 확고하지만 덜 자유롭다. 작품의 후반부로 갈 수록 이미지의 농도는 옅어지고, 문장의 자유도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