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 신영배 (문학과지성사, 2017)
- REVIEWS/시집
- 2021. 10. 13.
소녀와 달빛
소녀는 잠을 잔다 나무의 발목에서 우물의 옆구리까지 걸어간다 그사이 태어난 아기를 훔친다 아기를 달과 함께 우물에 던진다 엄마는 달려와 물을 퍼낸다 소녀는 계속 잠을 잔다 우물의 겨드랑이에서 나무의 손목까지 걸어간다 그사이 태어난 아기를 나무 위로 던진다 달과 함께 아기가 나뭇가지에 걸린다 엄마는 나무를 가만가만 타고 오른다 소녀는 잠을 잔다 나무의 목에서 공중의 물까지 걸어간다 그사이 태어난 아기를 지붕 위 달 옆에 올려놓는다 엄마는 집을 납작하게 찌그러뜨리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누가 아기를 여기다 낳아 놓았나! 엄나가 아기를 안는다 소녀는 계속 잠을 잔다
-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中
근래 나는 언어의 의미와 이미지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의미에 의지해 시의 중심에 다가서는 독법은 시 읽기를 매우 지루하게 만든다. 사실 신영배 시인의 시에는 여성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이전 시집들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시인이 제시하고 있는 의미를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시인이 그리고 있는 세계의 부드러운 질감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너무 익숙한 독법이다. 너무 익숙해서 개별 작품보다 먼저 존재하는 읽기 방식이다. 나는 익숙한 상징들로 구성되는 윤리적 기획보다, 신영배 시인이 만들어 내고 있는 낯선 이미지를 지지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시편들에서 단어가 결합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는 작법으로부터 시작되는 읽기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신영배적이라 할 수 있는 특징들이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곳곳에 배치되어 스스로 해독불가능한 지점을 만들고 있는 '물랑', '물울'과 같은 시어들은 그래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단어들은 의미의 강력한 구심력을 해체하기도 한다. '소녀가 잠을 잔다'나 '물병이 기울어졌다'는 얼마나 선명한 문장인가. '소녀', '물', '몸', '달' 등의 시어에서 촉발되는 의미보다, 명료한 단문에서 그려지는 이미지가 오히려 신영배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설명이나 명령보다는 주어, 술어의 낯선 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시의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