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연의 시에서 “나는 길게 누워 있는 섬 위의 저녁 구름에 / 서린 분홍 같은 것이었다가”(「한 사람」)와 같은 구절은 같은 작품의 “미래에서 자고 있는 내 아이의 꿈에 / 들려오는 자장가 / 들어본 적 없이 떠오르는 / 노래의 끊어진 마디들”이라는 구절과 발화 방식이 다르다. 언어가 결합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파생되는 원리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독자의 기억을 매개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고, 일상 또는 사전적 의미에 기대어 특정 의미를 조립해내고 있는 문장일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낯설게 결합하고 있는 “나의 목소리는 / 한없이 당신의 목소리와 겹쳐져서 / 이어지다가 시작된 철자로서 끝이 나는 나의 이름을 / 허공에 그리며 사라져갔습니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와 같은 문장은 실재하지 않음에도..
나는 평로가가 되기 위해서 이곳 '말이 누웠던 자리'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글을 쓰는 것이 오락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놀이' 처럼 순수한 글쓰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남국재견에 대한 이 글도, 개인의 감상정도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더욱이 영화를 본 시점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오래전의 일이기때문에, 남아 있는 기억을 기록해둔 인상기 정도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영화를 찍고 싶게 만드는 영화 사실 나는 영화를 '서사'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것보다는 영화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 더 관심이 많다. 영화를 영화답게 하는 것은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 신해철 1990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이 세상 살아가는 이 짧은순간에도 우린 얼마나 서로를 아쉬워 하는지 뒤돌아 바라보면 우린 아주 먼길을 걸어 왔네 조금은 야위어진 그대의 얼굴모습 빗길속을 걸어가며 가슴 아팠네 얼마나 아파해야 우리 작은 소원 이뤄질까 그런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 난 포기 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들의 만남에 후횐없겠죠 어렵고 또 험한길을 걸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조금은 야위어진 그대의 얼굴모습 빗길속을 걸어가며 가슴 아팠네 얼마나 아파해야 우리 작은 소원 이뤄질까 그런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 난 포기 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들의 만남에 후횐없겠죠 어렵고 또 험한길을 걸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신해철 솔로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무한궤도 해체이후 이제 막 ..
체인질링 영물들에게 둘러싸여 눈부신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동심원들이 찰랑거렸습니다. 깊이 깊이 아주 깊은 데까지 젖은 돌이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습니다. 바꿀 것이 있는데 나의 아름다운 악몽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지평선이 없었습니다. 시집 『생물성』과 마찬가지로 신해욱의 시집은 시집의 첫번째 시에서 이후 시에 대한 많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김소연 시인의 설명처럼(「헬륨 풍선처럼 떠오르는 시점과 시제」,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 발문 中) 신해욱의 시는 연과 연 사이에 깊은 계곡이 흐른다. 아득한 시차가 느껴지기도 하고, 앞 연의 의미가 뒤따라 오는 연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아, 의미의 이해가 지연되기도 한다. 위의 작품은 '영물 - 동심원 - 젖은 돌 - 악몽 - 지평선', ..
축, 생일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
우리는 해가 뜰때 일어나 밭을 일구었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꿈으로 엮은 노래를 불렀네 - 「보리 감자 토마토」 中 박은지 시인의 시를 읽었다. 「정말 먼 곳」이라는 등단작은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선명한 묘사보다 쓸쓸한 독백으로 가득 찬 시집이었다. 그야말로 "꿈으로 엮은 노래". 꿈은 묘사를 통해 보여주기 보다, 들려주어야 한다. 밤새도록 누군가의 귓가에 고백되어야 한다. 추상으로 가득한 꿈을 간결한 독백으로 들려주는 것이 박은지 시의 미덕이다. 이때 '꿈'은 '기억'이라는 이름을 치환 가능하며, 박은지의 시가 자유를 확보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시인은 수시로 꿈 속으로 들어간다. 꿈에서는 어제를 살고 깨어나서는 내일을 살았다 - 「뜸하게, 오늘」中 한편 시인에게 '꿈'은 일종의 도피처..